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읽었다.
제목은 ‘연명치료 중단, 그 선택의 무게’. 기사 속 한 가족의 이야기는 나를 깊은 침묵으로 이끌었다.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가족은 ‘더 이상 고통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그 선택이 사회적으로 ‘불효’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읽고 난 뒤, 문득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됐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이 ‘불효’라는 이름으로 매도되어야 하는 걸까.
우리는 흔히 말한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그건 진실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모, 혹은 형제자매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가슴 시린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욱 힘겨운 건, 그 마지막 순간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이다.
연명치료는 단어 그대로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 행위다.
산소호흡기, 약물투여, 심폐소생술, 인공영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유예한다.
그러나 그것이 ‘삶을 연장하는 일’인지, 아니면 ‘죽음을 늦추는 일’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많다.
때론 그 연장은 환자의 고통을 더욱 길게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마음, 단 하루라도 더 곁에 있고 싶은 간절함.
그것이 우리를 연명치료라는 선택 앞에 서게 만든다.
그러나 때론 그 사랑이, 너무나도 이기적인 집착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누워 있는 그분의 고통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환자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남아 있는 가족들의 마음을 위한 것인가.
만약 나였다면… 쉽지 않은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고통스러운 의식 속에서도 “그만하면 됐다”는 눈빛을 보낸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연명치료의 중단이 곧 불효라는 말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진정한 효도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용기 있게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고통을 짊어지면서도, 그분이 평온하게 떠날 수 있도록 선택해드리는 것.
누군가 말했다. “죽음 앞에 인간은 겸손해진다.” 그 말처럼 우리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 단지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연명치료 여부를 두고 가족 간에 미리 충분히 대화하고, 그 사람의 뜻을 존중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도 정착되었으면 한다.
그래야만 남은 이들이 ‘불효’라는 단어에 무너지는 일이 줄어들 수 있다.
오늘도 그 기사를 떠올리며 조용히 생각해본다.
연명치료,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그날을 맞이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 답은 아마도, 마음속에서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야 조용히 내려질 것이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한 진심만으로.
내자신에게 수백번 질문을 해도 여전히 모르겠지만 누워있는분도 약물과 치료를 위한 고통은 힘들테고 보호자도 힘들거 같다
이별이 무섭고 두렵지만 선택을 해야하는게 보호자의 몫인거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제일 싫은것중에 하나다..
보호자로서의 선택..